꿈해몽

자동차 꿈 해몽

논어 위정 편은 수레를 두고 묻지만 실은 사람을 두고 묻습니다. 대거무예 소거무월 기하이행지재(大車無輗,小車無軏,其何以行之哉) — 큰 수레에 예(輗)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軏)이 없으면, 그것이 대체 어떻게 가겠는가. 수레는 바퀴만으로 가지 않아요. 끌채 끝에 멍에를 붙들어 매는 작은 비녀장 하나가 있어야 가고, 공자는 그 자리에 믿음을 놓았습니다. 이 페이지가 탈것을 읽는 축이 그것이에요 — 탈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싣고 있고 무엇이 그것을 붙들고 있는가. 옛 책에 자동차는 없습니다. 거기 나오는 車는 소가 끄는 수레이고, 싸움터의 병거이고, 사람이 메는 가마예요. 그래도 옛사람이 탈것을 두고 던진 물음은 지금 이 꿈을 안고 오는 사람이 던지는 물음과 같습니다. 다만 이 페이지가 하지 않을 일이 하나 있어요. 잠 속의 사고를 당신 앞길의 사고로 바꿔 읽지 않습니다. 전통 자신이 뒤집힌 수레를 예정표로 읽은 적이 없어요.

전통은 이렇게 읽습니다

車가 실제로 무엇이었는지에서 시작할게요. 이 책들이 나온 세상에서 탈것은 곡식을 실어 나르는 소달구지이거나, 싸움터의 병거이거나, 사람이 어깨에 메는 가마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진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어요. 신분이 있다는 뜻이거나, 옮길 만한 짐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옛 글이 수레를 집어 들 때 그것은 거의 언제나 다니는 일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무엇이 실려 있는가, 누가 그것을 끄는가, 그리고 그 먼 길 내내 서로 붙어 있는가 — 이 셋을 말합니다. 이 페이지 전체가 그 셋이에요. 첫째는 주역에 있습니다. 대유 구이(大有 九二) — 대거이재 유유왕 무구(大車以載,有攸往,无咎). 큰 수레에 실었으니, 갈 데가 있고, 허물이 없다. 이 줄은 순서가 곧 독법이라 순서를 보셔야 해요. 수레가 크다고 칭찬받는 게 아닙니다. 실려 있다는 것과 갈 데가 있다는 것이 먼저 오고, 그러고 나서야 「허물이 없다」가 깨끗하게 나와요. 크기만 하고 빈 수레는 이 줄에 아예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 꿈의 따뜻한 갈래가 여기인데, 조건이 붙은 따뜻함이에요 — 지금 실제로 무언가를 싣고 있는 힘에 대한 말입니다. 둘째가 위정 편의 그 줄인데, 이 전통이 탈것을 두고 한 말 가운데 가장 날카로워요. 인이무신 부지기가야, 대거무예 소거무월 기하이행지재(人而無信,不知其可也。大車無輗,小車無軏,其何以行之哉). 사람이면서 믿음이 없으면 그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큰 수레에 예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이 없으면, 그것이 어떻게 가겠는가. 예(輗)와 월(軏)은 끌채 끝에 멍에를 붙들어 매는 비녀장입니다. 수레를 통틀어 가장 작은 부품에 들고 그것만 떼어 놓으면 아무 값도 없는데, 그게 없으면 바퀴도 몸체도 소도 길도 다 같이 쓸모가 없어져요. 공자는 이 비유에 바퀴나 굴대를 고르지 않았습니다. 이음매를 골랐어요. 무언가를 가게 하는 것은 끄는 쪽과 끌리는 쪽 사이의 이어짐이고, 사람의 삶에서 그 이어짐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 말이 지켜지는 사람인가 하는 것. 탈것이 도무지 나아가지 않는 꿈은 이 독법에서 엔진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이음매에 대한 물음이에요. 주역에는 탈것이 풀려 버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소축 구삼(小畜 九三) — 여탈복 부처반목(輿說輻,夫妻反目). 수레가 바큇살을 벗고, 부부가 서로 눈을 흘긴다. 여기 說은 脫로 읽어 벗는다는 뜻이고, 輻은 바큇살로 읽는데 옛 주석은 굴대를 몸체에 묶는 부분으로도 읽었어요. 어느 쪽이든 수레가 부서진 것도 아니고 다친 사람도 없습니다. 무언가가 헐거워졌을 뿐인데, 그 옆에 재앙이 아니라 집안의 다툼을 나란히 놓아 두었어요. 이상하면서도 아주 정직한 글입니다 — 고장과 틀어짐이 같은 모양이라는 것이니까요. 붙어 있던 둘이 이제 서로 어긋나게 움직인다는 뜻이지요. 이건 그려 놓은 것이지 점쳐 놓은 게 아니에요. 언제라는 말도, 누구에게라는 말도 그 줄에는 없습니다. 그다음이 뒤집힘이에요. 전거복 후거계(前車覆,後車誡) — 앞 수레가 뒤집히면 뒤 수레가 조심한다. 옛 속담으로 돌던 말인데 가의(賈誼)가 임금에게 올린 글에 쓰면서 글로 남았고, 한서(漢書)에 실려 있습니다. 이 페이지에서 가장 중요한 한 줄이에요. 뜻을 어디에 놓는지가 그렇습니다. 뒤집힌 수레는 뒤 수레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 뒤 수레가 쓸 수 있는 소식이고, 이 말의 힘은 통째로 뒤 수레가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어요. 뒤집힘을 정해진 운으로 읽는 전통이었다면 이 문장은 나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독법을 지키고 다른 쪽은 받지 않아요. 셋째 물음은 누가 나를 실어 주는가입니다. 박 상구(剝 上九) — 석과불식 군자득여 소인박려(碩果不食,君子得輿,小人剝廬). 큰 열매는 먹히지 않고,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오두막마저 헐린다. 득여(得輿)는 사서 갖는 게 아니에요. 남들이 실어 준다는 뜻이고, 그건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며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야장 편에서 무엇을 바라느냐는 물음에 자로가 이렇게 답해요 — 원거마의경구 여붕우공 폐지이무감(願車馬衣輕裘,與朋友共,敝之而無憾). 수레와 말과 가벼운 갖옷을 벗들과 함께 쓰다가 다 해져도 서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가 맨 먼저 댄 것이 탈것이었어요. 이 전통에서 나를 실어 주는 것은 요즘 말하는 사유물로 읽히지 않습니다. 남도 실을 수 있는 것으로 읽혀요. 여기에 우리 쪽 줄이 하나 더 있고, 아주 쉬운 말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짐 실은 수레는 낮게 가라앉아 조용히 가고, 소리는 빈 쪽이 냅니다. 이 속담은 처음부터 사람 이야기였지 다른 척한 적이 없어요. 빠르고 시끄럽고 아무것도 싣지 않은 탈것에 대해 이 페이지가 가진 독법은 이것 하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페이지가 넘지 않는 선을 둘 그어 둘게요. 제 것이 아닌 무게를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예요. 신발은 주소가 따로 있고 축이 반대입니다. 신발은 내 발이 하는 일이고, 딛고 서서 걸어가는 발밑이에요. 탈것은 그 반대 방향의 움직임입니다 — 실려 가는 것이고, 내 몸이 아닌 것이 내 힘이 아닌 것으로 옮겨 주는 것이니까요. 두 꿈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같지 않고, 신발 쪽 독법을 이리로 옮겨 오지 않습니다. 떨어지는 꿈도 주소가 따로 있어요. 차가 길 밖으로 나가는 꿈은 떨어지는 꿈이 아닙니다. 떨어짐은 발밑이 없어지는 일이고, 이쪽은 이음매가 놓아 버리는 일이에요. 출처를 대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요즘 도는 해몽 목록에는 수레나 가마를 타면 벼슬이 들어온다는 줄이 자주 실려 있고, 車가 무엇을 뜻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럴듯하기도 해요. 다만 그 독법을 옛 문헌까지 거슬러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페이지에 올리지 않았어요. 출처를 댈 수 없는 것으로 채우느니 빈자리로 두는 쪽이 낫습니다.

갈래마다 다르게 읽어요
내가 운전하고 있고, 길이 잘 나간다
대거이재 유유왕 무구 — 큰 수레에 실었으니 갈 데가 있고 허물이 없다. 주역이 탈것에 준 가장 따뜻한 줄인데, 그 안에 조건이 들어 있는 걸 보세요. 깨끗한 판단이 붙는 자리는 크기만 한 수레도 아니고 그냥 굴러가는 수레도 아니라, 무언가를 싣고 갈 데를 향해 가는 수레입니다. 지금 실을 것이 있고 방향도 있는 힘의 그림으로 읽으세요. 길이 계속 트여 있으리라는 예고가 아니에요.
남이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나 뒷자리에 앉아 있다
박 상구에 군자득여, 군자는 수레를 얻는다가 있어요 — 실려 간다는 것은 사서 갖는 게 아니라 남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자로도 무엇을 바라느냐는 물음에 수레와 말을 벗들과 함께 쓰고 싶다고 가장 먼저 답했어요.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 타고 가는 옛 독법은 지금 내가 무엇에 실려 가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고, 그게 무엇인지 가만히 물어볼 만합니다. 이 꿈이 하지 않는 것은 운전한 사람을 읽는 일이에요.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을 정할지 여기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꿈은 그 꿈을 꾼 사람 말고는 아무에게도 닿지 못해요.
시동이 안 걸리거나, 브레이크가 안 듣거나, 멈출 수가 없다
위정 편이 곧장 이 자리로 옵니다. 대거무예 소거무월 기하이행지재 — 멍에를 끌채에 매는 비녀장이 없으면 그것이 어떻게 가겠는가. 전통은 바퀴를 탓하지 않았어요. 끄는 쪽과 끌리는 쪽 사이의 그 작은 이음매를 봤습니다. 소축 구삼의 여탈복도 같은 그림이에요 — 무언가가 헐거워진 것인데, 그 옆에 재앙이 아니라 집안의 다툼을 놓아 뒀습니다. 붙들고 있어야 할 이어짐이 지금 붙들지 못하고 있다는 물음으로 읽으시고, 당신 차에 대한 경고로는 읽지 마세요.
사고가 나거나 차가 뒤집힌다
전거복 후거계 — 앞 수레가 뒤집히면 뒤 수레가 조심한다. 가의가 임금 앞에 올린 글에 쓴 이 말이 이 꿈에 대한 전통 자신의 대답이고, 천천히 읽을 값이 있어요. 뒤집힘은 아직 뒤집히지 않은 쪽이 쓸 수 있는 소식입니다. 예정표의 정반대예요. 여기 어느 줄도 사고가 온다고 말하지 않고, 여기 어느 줄도 당신 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꿈에 놀라셨다면 놀라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고, 그 놀람도 기별이 아니에요.
차가 없어졌거나 어디 뒀는지 모르겠다 — 또는 텅 빈 채 요란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짐 실은 수레는 낮게 가라앉아 조용히 갑니다. 이 속담은 처음부터 사람 이야기였고, 빠르고 시끄럽고 아무것도 싣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 쪽이 지켜 온 독법이 이것이에요. 찾지 못하는 탈것에 대해서는 옛 글이 바라는 만큼 말해 주지 않습니다. 득여가 사서 가진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었으니, 탈것이 사라지는 자리는 재산보다 기대고 있던 것 쪽에 가깝다고만 해 둘게요. 없는 판정을 지어내느니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 꿈이 대개 하는 일

운전은 많은 사람이 날마다 별생각 없이 해내는 몇 안 되는 복잡한 일이고, 그래서 잠에게는 아주 좋은 재료예요. 일주일에 몇 시간씩 핸들을 돌리고 페달을 밟고 거리를 가늠해 온 몸에는 그게 전부 쌓여 있고, 꿈은 가장 많이 만져 본 것으로 지어집니다. 자동차 꿈 상당수는 그것만으로 설명이 끝나고, 풀어야 할 것이 남지 않아요. 브레이크가 하필 말을 안 듣는 이유도 같은 데서 옵니다. 차에서 통제는 관념이 아니에요. 한쪽 발 밑의 정해진 힘이고 정해진 결과입니다. 무언가를 맡아 쥐고 있다는 느낌과 아주 가까워요. 꿈에서 페달이 물렁해질 때 그려지는 것은 눌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느낌이고, 사람들은 깨어 있는 삶에서 그 느낌을 곧바로 알아보면서도 이렇게 또렷한 그림으로는 좀처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림은 정확해요. 정확하다고 해서 앞일을 말해 주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이 둘 있어요. 이 꿈은 당신을 채점하지 않습니다 — 운전하지 않고 실려 간 것은 게으름이 아니고 운전한 것이 미덕도 아니에요. 득여를 영예로 읽던 전통이라면 요즘의 그 등식을 낯설어할 겁니다. 그리고 지시도 아니에요. 여기 어느 줄도 일정을 미루라거나 어느 길을 피하라거나 무엇을 점검하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밤을 실제 차에 대한 경고로 다루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사고 꿈이 마음에 걸려 있다면 그 마음은 살살 다뤄 주세요. 그건 증거가 아닙니다.

이 꿈에 대해 자주 묻는 것

차 사고 나는 꿈을 꿨어요. 진짜로 사고가 난다는 뜻인가요?

아니에요. 이 대목에서는 전통이 유난히 분명합니다. 뒤집힌 수레에 대해 전해 온 말은 전거복 후거계 — 앞 수레가 뒤집히면 뒤 수레가 조심한다 — 이고, 이 말의 힘은 통째로 뒤 수레가 앞 수레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데 있어요. 뒤집힘을 배울 거리로 다루지 정해진 일로 다루지 않습니다. 여기서 당신의 앞일이나 안전을 계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꿈은 아직 달리지 않은 길을 볼 수 없어요. 놀라셨다면 생생한 꿈 뒤에 놀라는 건 아주 흔한 일이고, 그건 기별이 아닙니다.

옛날엔 자동차가 없었잖아요. 이 해석을 그대로 가져다 써도 되나요?

무엇이 넘어왔는지를 정직하게 말하면 그럴 만합니다. 이 글들에 나오는 車는 소달구지이고 병거이고 가마예요. 아닌 척하지 않을게요. 넘어온 것은 기계가 아니라 그것을 두고 던진 물음입니다 — 무엇이 실려 있는가, 무엇이 붙들고 있는가, 누가 실어 주는가. 이 물음들은 엔진이 있든 없든 그대로예요. 수레에만 맞는 옛 독법은 그럴듯하게 손보지 않고 아예 빼 뒀습니다. 요즘 널리 도는 줄 하나, 수레나 가마를 타면 벼슬이 들어온다는 말도 옛 문헌까지 거슬러 확인하지 못해 이 페이지에 올리지 않았어요.

남이 운전하는 꿈이었어요. 그 사람이 제 인생을 좌우한다는 뜻인가요?

그런 뜻이 아니고, 이 페이지는 다른 사람을 대신 읽어 주지 않습니다. 꿈은 잠든 한 사람이 자기가 본 것으로 지은 것이라 그 한쪽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어요. 운전석에 앉은 사람에 대한 정보도, 그 사람이 무엇을 정할지에 대한 정보도 거기 없습니다. 다만 득여의 옛 독법이 가리키는 것은 남겨 둘 만하고, 그건 당신 쪽 이야기예요 — 실려 간다는 것은 남에게서 받는 것이니, 지금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를 물어볼 만합니다. 그 물음은 당신 것이고, 누구에 대한 판정도 아니에요.

신발 꿈이랑은 뭐가 다른가요?

가깝게 느껴지는데 축이 반대라서 일부러 갈라 둡니다. 신발은 발밑으로 읽어요 — 내 발이 딛고 서서 걷는 자리이고, 그쪽 옛 독법은 얻고 잃고 닳는 데서 갈립니다. 탈것은 실려 가는 것이에요. 그 움직임은 내 몸이 만들지 않고, 내가 지쳤다고 멈추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신발 꿈은 무엇을 딛고 서 있느냐를 묻는 쪽이고, 이 꿈은 무엇이 나를 옮기고 있으며 무엇이 그것을 붙들고 있느냐를 묻는 쪽이에요. 신발 쪽 독법을 여기로 가져오지 않는 건, 옛 자료가 둘을 한 가지로 다룬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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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주소를 가진 다른 꿈

여기 적힌 것은 한국 전통 해몽의 독법이지 예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당신의 미래를 계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런 척하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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